0의 일지 

 

 

한명은 도자기를 만들고, 한명은 그림을 그린다.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드는 일과 붓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다루는 이의 신체가 직접 가 닿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도자기와 그림은 신체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진 흔적이고 기록이다. 

 

주세균의 Text Jar 연작은 단어를 돌려서 얻은 환의 형태를 도자기에 적용시킨 작업이다. 주세균은 <0의 일지>를 위해 이보람 작업의 키워드를 직접 선정했다. ‘망각’, ‘기억’, ‘가벼움’, ‘무거움’은 주세균이 이보람과의 대화에서 걷어 올린 단어들이다. 각각의 단어가 가진 형태는 ‘돌리는 행위’에 의해 재해석, 재창조된다. ‘망각’, ‘기억’, ‘가벼움’, ‘무거움’은 새로운 환의 형태와 이보람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분홍빛을 갖는다. 

 

이보람은 이렇게 만들어진 ‘망각’과 ‘기억’과 ‘가벼움’과 ‘무거움’의 도자기들을 자신의 피부 위에 올린다. 이보람의 그림 속에서 작가 자신의 피부와 도자기의 표면/피부는 서로 닮아 간다. 사람의 피부색과 비슷하면서도 사물을 연상시키는 핑크톤의 광이 있는 색과 질감은 서로 다른 둘을 합하고, 나눈 결과물 같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는 방향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게 묘사된 그림자 때문에 확연히 구분된다. 

 

거리는 항상 존재한다. 

이보람의 피부와 도자기의 표면. 

주세균의 ‘망각’과 ‘기억’과 ‘가벼움’과 ‘무거움'의 도자기들과 이보람의 말에서 수집된 ‘망각’, ‘기억’, ‘가벼움’, ‘무거움’.  

이보람의 그림과 주세균의 도자기.

이보람과 주세균.

둘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존재한다. 

 

‘0’은 둘 사이를 말하기에 좋은 숫자인 것 같다. 마치 ‘0처럼 보이는’ 둘 사이의 거리. 그렇지만 어떤 의미로는, 그 둘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닌’ 사이일 수도 있다. 사이와 관계가 의미를 가지려면, 나는 너가 필요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 ‘나와 너의 사이’에, 주세균의 도자기와 이보람의 그림들에 의미를 실어줄 수 있는 것은 나라는 누군가와 너라는 누군가가 지닌 공통점이 아니라, 같이 바라보는/바라볼 수 있는 무엇이다. 

 
 
Skin 5, 2017, oil on canvas, 91x91cm
이보람, 주세균, 0의 일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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